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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관광

문화/역사

새로찾은 오장환 시

초기시

오장환 시인은 일찍이 길거리에 버려진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도 바다와 파도 소리를 듣는 아름다운 환상과 직관의 시인이었다.

강을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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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닥불. 모닥불. 은은히 붉은 속. 차차 흙 밑에는 냉기가 솟고. 재 되어 스러지는 태(胎). 강 건너 바람이, 날 바보로 만들었구려. 파락호 호주(胡酒)에 운다. 석유불 끔벅이는 토담방 북데기 깐 토담방 속에. 빽빽이는 갓난애. 갓난애 배꼽줄 산모의 미련을 끊어. 모닥불. 모닥불 속에. 은근히 사그라진다.

    눈 녹아. 지평 끝, 쫓아오는 미더운 숨결. 아직도 어두운 영창의 문풍지를 울리며. 쑤성한 논두렁. 종다리 돌을 던지며 고운 흙. 새 풀이 나온다. 보리. 보리. 들가에 흩어진 농군들. 봄밀. 봄밀이, 솟쳐오른다. 졸. 졸. 졸. 하늘 있는 곳 구름 이는 곳. 샘물이 흐르는 소리.

  • 해마다, 해마닥. 강을 건너며. 강을 건너며. 골짜기 따라 오르며. 며칠씩, 며칠씩, 불을 싸질러. 밤하늘 끄실렀었다. 풀 먹는 사슴이. 이슬 마시는 산토끼. 모조리 쫓고. 조상은 따비 이루고. 무덤 만들고. 시꺼먼 뗏장위에 산나물 뜯고. 이 뒤에사 이 뒤에사 봄이 왔었다.

    어찌사 어찌사 울을 것이냐. 예성강이래도 좋다. 성천강이래도 좋다. 두꺼운 얼음장 밑에 숨어 흐르는 우리네 슬픔을 건너. 보았으니. 보았으니. 말없이 흐르는 모든 강물에. 송화. 송화. 송홧가루가 흥건히 떠내려가는 것. 십일평야(十日平野)에 뿌리를 박고 어찌사 울을 것이냐. 꽃가루여. 꽃수염이여.

고향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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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 간간이 잔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商賈)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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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
    예 흙이 향그러

    단 한번
    나는 울지도 않었다.

    새야 새 중에도 종다리야
    화살같이 날러가거라
    나의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야

  • 나의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야

    단 한번
    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목욕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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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수업료를 바치지 못하고 정학을 받아 귀향하였을 때 달포가 넘도록 청결을 하지 못한 내 몸을 씻어보려고 나는 욕탕엘 갔었지
    뜨거운 물속에 왼몸을 잠그고 잠시 아른거리는 정신에 도취할 것을 그리어보며
    나는 아저씨와 함께 욕탕엘 갔었지
    아저씨의 말씀은 "내가 돈 주고 때 씻기는 생전 처음인걸"하시었네
    아저씨는 오늘 할 수 없이 허리 굽은 늙은 밤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가지고 팔러 나오신 길이었네
    이 고목은 할아버지 열두 살 적에 심으신 세전지물(世傳之物)이라고 언제나 "이 집은 팔아도 밤나무만은 못팔겠다."하시더니 그것을 베어가지고 오셨네그려
    아저씨는 오늘 아침에 오시어 이곳에 한 개 밖에 없는 목욕탕에 이 밤나무 장작을 팔으시었지
    그리하여 이 나무로 데운 물에라도 좀 몸을 대이고 싶으셔서 할아버님의 유물의 부품이라도 좀더 차이 하시려고 아저씨의 목적은 때 씻는 것이 아니었던 것일세
    세시쯤 해서 아저씨와 함께 나는 욕탕엘 갔었지

  • 그러나 문이 닫혀 있데그려
    "어째 오늘은 열지 않으시우" 내가 이렇게 물을 때에 "네 나무가 떨어져서" 이렇게 주인은 얼버무렸네
    "아니 내가 아까 두시쯤 해서 판 장작을 다 때었단 말이요?" 하고 아저씨는 의심스러이 뒷담을 쳐다보시었네
    "へ, 實は 今日が市日で あかたらけの田舍っぺ一が群をなして來ますからねえ"
    하고 뿔떡같이 생긴 주인은 구격이 맞지도 않게 피시시 웃으며 아저씨를 바라다보았네
    "가자!"
    "가지요" 거의 한때 이런 말이 숙질의 입에서 흘러나왔지
    아저씨도 야학에 다니셔서 그따위 말마디는 알으시네 우리는 괘씸해서 그곳을 나왔네
    그 이튿날일세 아저씨는 나보고 다시 목욕탕엘 가자고 하시었네
    "못 하겠습니다 그런 더러운 모욕을 당하고……"
    "음 네 말도 그럴듯하지만 그래두 가자" 하시고 강제로 나를 끌고 가셨지

산협(山峽)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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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추운 겨울 이리떼는 어디로 몰려다니랴.
    첩첩이 눈 쌓인 골짜기에
    재목을 싣고 가는 화물차의 철로가 있고
    언덕 위 파수막에는
    눈 어둔 역원이 저녁마다 램프의 심지를 갈고.

    포근히 눈은 날리어
    포근히 눈은 내리고 쌓이어
    날마다 침울해지는 수림(樹林)의 어둠 속에서
    이리떼를 근심하는 나의 고적은 어디로 가랴.

    눈보라 휘날리는 벌판에
    통나무 장작을 벌겋게 지피나
    아 일찍이 지난날의 사랑만은 따스하지 아니하도다.

  • 낭에는 한 줌의 보리 이삭
    쓸쓸한 마음만이 오로지 추억의 이슬을 받아 마시나
    눈부시게 훤한 산등을 내려다 보며
    홀로이 돌아올 날의 기꺼움을 몸가졌노라.

    눈 속에 싸인 골짜기
    사람 모를 바위틈엔 맑은 샘이 솟아나고
    아늑한 응달녘에 눈을 헤치면
    그 속에 고요히 잠자는 토끼와 병든 사슴이.

    한겨울 내린 눈은
    높은 벌에 쌓여
    나의 꿈이여! 온 산으로 벋어 나가고
    어디쯤 나직한 개울 밑으로
    훈훈한 동이가 하나
    온 겨울, 아니 온 사철
    내가 바란 것은 오로지 따스한 사랑.

    한동안 그리움 속에
    고운 흙 한 줌
    내 마음에는 보리 이삭이 솟아났노라.

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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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운 달밤에
    상여야, 나가라
    처량히 요령흔들며

    상주도 없는
    삿갓가마에
    나의 쓸쓸한 마음을 실고

  • 오날 밤도
    소리없이 지는 눈물
    달빛에 젖어

    상여야 고웁다
    어두운 숩속
    두견이 목청은 피에 적시여......

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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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면에 누워 조용히 눈물 지우라.
    다만 옛을 그리어
    궂은비 오는 밤이나 왜가새 나는 밤이나

    조그만 돌다리에 서성거리며
    오늘 밤도 멀리 그대와 함께 우는 사람이 있다.

    경(卿)이여!
    어찌 추억 위에 고운 탑을 쌓았는가
    애수가 분수같이 흐트러진다.

  • 동구 밖에는 청랭한 달빛에
    허물어진 향교 기왓장이 빛나고
    댓돌 밑 귀뚜리 운다.

    다만 울라
    그대도 따라 울으라

    위태로운 행복은 아름다웠고
    이 밤 영회의 정은 심히 애절타
    모름지기 멸하여 가는것에 눈물을 기울임은
    분명, 멸하여 가는 나를 위로함이라. 분명 나 자신을 위로함이라.

우기(雨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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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판방엔 곰팡이가 목화송이 피듯 피어났고
    이 방 주인은 막벌이꾼. 지게목바리도 훈김이 서리어올랐다

  • 방바닥도 눅진눅진하고 배창자도 눅진눅진하여
    공복은 헌겁오래기처럼 뀌어져나오고
    와그르르와그르르 숭얼거리어
    뒷간 문턱을 드나들다 고이를 적셨다.

은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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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픔이야 노상 새로워
    내, 떠나는 길차림
    오늘마저
    해안 공원의 호젓한 자리

    사랑하는 건 모두 다 버리는구나
    애틋한 담모롱이
    등 굽은 길목.

    사슴과 나는 철망 너머로
    낯선 바다를 본다.

  • 이슬보다 오히려 차고 고운 것
    철기는 슬프고나
    아름다운 꽃잎알
    흔들리는 꽃수염.

    우는 것이 쉽구나
    제일 쉽구나.

    말랑말랑한 뿔, 새로 돋은 사슴의 뿔.
    무심코 자근자근 누르며
    기위 떠나려면야
    바램 하나 가져야겠네. 있어야겠네.

초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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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부르는 노래
    어데선가 그대도 듣는다면은
    나와 함께 노래하리라
    "아 우리는 얼마나
    기다렸는가......" 하고

    유리창 밖으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한겨울
    나는 아모데도 못 가고
    부질없는 노래만 불러 왔구나

    그리움도 맛없어라
    사모침도 더디어라

  • 언제인가 언제인가
    안타까운 기약조차 버리고
    한동안 쉴 수 있는 사랑마저 미루고
    저마다 어둠 속에 앞서던 사람

    이제 와선 함께 간다
    함께 간다
    어디선가 그대가 헤매인데도
    그 길은 나도 헤매이는 길

    내가 부르는 노래
    어데선가 그대가 듣는다면은
    나와 함께 노래하리라.
    "아 우리는 얼마나
    기다렸는가......" 하고